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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다

[글쓰기 22일] 남자에 대한 밍밍한 수다

by 셜리 202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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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불편한 남자

이전 사무실에서 옆 사무실에 있던 대표님과 나는 가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특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웃과 잘 지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이 분과는 대화가 잘 안되는구나'라고 느껴졌다. 그 대표님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도 이제 반세기를 지내서인지,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생각의 차이도 커지는 탓일 게다.

 

그런데 그 분에게 내 이야기의 내용은 그닥 중요하게 느끼지 않는 듯, 그저 내 음성과 표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 느낌 탓에, 그 시간이 내게 소모적이라고 자주 느껴졌다. 그분이 내게 호감이 있는 것같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모를 일이다. 다만 그런 남자들을 살면서 드물지 않게 봤다는 걸 얘기하고 싶다. 그런 경우에는 대화가 서로 전혀 섞여지지 않기 십상이다. 더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대로 내 이야기가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이, 그런 상황이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웃이라 예의로 대하게 되지만, 불편하다. 이런 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안봐도 되는 걸 본 남자

내키지 않는 맞선을 보던 날들 중에는 나름의 잔머리로 바람을 교묘하게 놓았던 날도 있었다. 이를테면, 일부러 약속 장소와 다른 데 가서 기다리면서 상대방이 안나온 거같다는 식이었다. 내 기억에 그 수법을 2번 정도 썼을 뿐인데도, 우리 엄마는 특유의 촉으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라는 의심을 품으셨다.

 

그 날은 왠일로 내 맞선 자리에 엄마가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엄마가 막무가내로 서두르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원래의 나라면 30분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벌써 샜을텐데, 엄마는 약속 시간까지 함께 기다리시겠단다. 그렇다. 내가 어딘가로 못 새게 따라 나오신거였다. 엄마의 속셈은 알아챘다 해도 그걸 따지기에는 내가 떳떳하지 않았어서, 기다리는 동안 엄마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30초반이지만, 안에서와 바깥에서 말투가 그때까지도 많이 다른 편이었다. 어린냥 말투, 차분한 아나운서(?) 말투, 남자같은 무뚝뚝한 말투, 이렇게 세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집에서는 어린냥 말투와 무뚝뚝한 말투를 기분에 따라 썼었다. 그날은 엄마 앞이라, 어린냥 말투로 "아니야아~, 엄마아~, 오노, 저런 스타일은 엑스엑스~" 휴, 지금은 흉내내보기도 어색한 말투가 되었지만, 그때의 나는 소위 그 '어린냥 말투'로 까르르 거리며 30분 정도 얘기를 했다.

 

시간이 되니 엄마는 나를 잡아두려던 목적을 달성하고 일어나셨다. 호텔 카페에서 점원의 안내로 맞선남을 찾고 보니, 엄마와 같이 있던 자리의 윗층 자리에 상대가 앉아 있었다. 먼가 쎄한 기분이 들었지만, 차분한 말투로 인사하며 내 이름을 밝혔다. 자리에 앉고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남자의 입가가 한쪽으로 실룩거렸다. 내가 이상하게 쳐다보니, 그제서야 남자가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저도 30분 전부터 도착해서 여기 있었어요"

'하....음...그래, 내 어린냥 목소리를 들었구나, 들었어.' 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꿋꿋하게 차분한 말투를 끝까지 유지했다. 그 뒤로 이 남자는 만나는 내내 어떤 기대를 갖고 나를 대했다. 언젠가는 그 어린냥 말투로 자신에게 말 걸어주겠지라는 기대. 하지만 3번 정도 만나보고는 더이상 만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남자가 편하지 않았다.

 

문득 드는 생각은 어린냥 목소리를 들은 바깥 남자는 그 남자가 거의 유일했다는 거. 그러나 의미는 없다.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붙이자면, 유일했던 남자들 리스트 금방 만든다. 나, 참, 드라이하네.

 

 

노력했지만, 바라던 바가 아닌 남자

그는 취미도 관심사가 나와 비슷했고 집안 환경이나 분위기도 비슷해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국내외로 장기 출장이 많아서, 기혼자들에게는 가족과 같이 출장을 갈 수 있게 배려도 해준다고 했다. 결혼은 먼 얘기였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괜찮게 들리는 소리였다. 키도 크고 남자답게 생긴 편이고.

 

그런데, 데이트를 하는 동안 그 남자는 자신의 관심사나 취미를 나와 공유하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였다. 서로 비슷한 취미와 관심사가 섞여지지 않으니, 그는 내게 '그림의 떡' 같아보였다. '지금부터 내 여자 친구하는 거'라는 그의 말과 달리 나를 아직 덜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좀더 노력해야겠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남자친구의 절친을 소개해주는 날, 나는 그 이유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 절친과 함께 자리 한 부인과는 대충 보기에도 부부 관계가 위태해보였다. 그 절친은 좋게 말해서 관종 기질이 강한 활달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의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본인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 남자친구의 성격은 그 절친과 정반대였지만,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공유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을 서로의 얘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내 귀를 때리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철 없을 때는 여자도 같이 나눠서 사귀었어요."

 

나는 그날로 그 남자와 헤어졌다. 며칠 뒤에 문자나 전화로 만나지 않겠다고 얘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내가 느낀 점은 그가 자신의 절친과 마찬가지로 여자와는 소통하지 않는, 소통할 수 없는 성향이라는 것이었다. 내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확신했으니, 더는 만날 수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남자

내가 왜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얼뜻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부정적인 건 또렷이 기억하면서 이런 건 또 기억이 흐린 게 상당히 모순이다. 아마도 그가 '너는 누구니'라는 느낌으로 내게 다가와서였을까? 실제로 그런 질문을 던진 건 아니라서 내 착각일 수도. 그를 만날 때면,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속사포같은 질문들이 내게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마치 내 허락도 없이 우리 집의 방문들을 마구잡이로 빠른 속도로 열어제끼고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성격이 급한 편이었고, 그런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이점에서 분명히 나와 반대였다. 내가 행동이 느린 편은 아니지만, 마음은 확실히 느린 사람이니.

 

처음 만날 때가 떠오른다. 비가 추적거리는 날이었는데 약속 장소로 걸어가며 잔뜩 짜증이 났었다. 소개팅 대상이 무척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기 편하자고 자신의 직장 근처 카페로 잡았으니 말이다.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대기업 다니는 남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단다. 일종의 간 보는 거라나, 머라나.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길을 찾느라 고생까지 하게 돼서, 화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되어 버렸다. '나보고 늦었네의 ㄴ자만 얘기해도 바로 일어나서 나가버려야지'라고 미리 마음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소개팅 주선자인 사촌오빠를 생각해서 자리에는 앉았지만, 나는 일어나 나가버릴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불을 뿜어대면서. 그때 불쑥 그는 테이블에 있던 칼을 집어서 내게 쥐어줬다. '찌르고 싶은 사람 있으면 찌르세요'라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콧김이 새어 나와버렸다. 심지어 의외로 그는 '늦었네요'라는 눈치를 내게 전혀 주지 않았다. 그 후로 몇번을 더 만나고 나서야 내게 그날 왜 그랬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떼었지만, 그 순간 스스로에게 걸어두었던 주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헤어져야 하나?'라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남자 친구는 번개같이 태세전환을 했다. '아니야. 너는 항상 옳아. 내가 잘못 한거야'라고. 조금 웃기지만, 영화 견우와 직녀가 떠오르는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비오는 11월이면 가끔 그때가 떠오른다. 시시하게 끝나버린 인연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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