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할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 집과 막내였던 아버지 집을 오가며 지내셨다. 할아버지는 짓궂은 성격이 있으셔서, 머무시는 동안에는 우리 삼 형제에게는 약간의 비상사태와 같은 긴장감이 돌곤 했다. 언제 훅 하고 장난이 들어올지 몰라서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심심할 때는 항상 막내딸인 나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말없이 장난기 하나 없이 정처 없이 걷고 나서는 길거리에 풀썩 주저앉아서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앉아 계시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설마 몇 시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6,7살의 어린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긴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옆에서 얌전히 앉아서 아이에게는 너무나 길고 긴 시간을 내가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샘베 과자 덕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샘베 과자 가게에 들러서 과자를 잔뜩 사주셨었다. 그중에서도 늘 내가 선택했던 것은 상투과자였다. 할아버지 옆에서 나도 할아버지와 똑같이 주저앉은 자세로 앉아있곤 했는데, 남이 보면 좀 우스워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비슷한 표정으로 멍하니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 상투 과자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곤 했다.
할아버지가 큰집에 가셔서 없을 때도, 스스로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양지바른 땅바닥에 그 특유의 할아버지 자세로 주저앉아 멍하니 이런 저런 상상에 젖고는 했다. 물론 어린아이가 혼자서는 살 수 없었던 샘베 과자 맛을 떠올리는 것도 빠질 수 없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든가, 신비로운 존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꾸 그 너머를 넘겨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점차로 지나가는 사람들로 주요 관찰 대상이 바뀌었던 것같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왜 표정이 안 좋지? 왜 웃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6,7살 배기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어, 난 저 사람들을 모르네?
어린아이는 나와 남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마련이라, 당시 나에게는 그것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 지나가는 사람들도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아이답지 않게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지? 첫 번째로 떠오른 사람은 엄마였다. 아, 그래 엄마는 나를 알지. 그런데 엄마도 언제가는 없어질 수 있지 않나? 그럼 나도 사라질 수 있는 거네? 엄마도 죽고, 나도 죽으면, 내가 이 세상에, 이 순간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겠구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자연스럽게 "죽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나에게는 크나큰 슬픔과 공포로 다가왔다. 그 후로부터 일주일인지, 한달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꽤 긴 시간을 아이답지 않은 우울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오로지 그 '죽음'에 대한 생각에만 몰입되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비교적 길었던 심각한 순간은 의외로 쉽게 부서져버렸다. 내게는 오빠가 둘이 있는데, 작은 오빠가 아이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의 나를 발견했고, 오빠도 당시에 아이였던 터라, 왜 그러니라고 묻기보다는,
야, 김일성이 죽었데!
어린아이였던 나는 오빠 말을 순수하게 그대로 믿었고, 어, 정말, 진짜야? 했다.
뻥이야! 이 바보야, 속냐?
순간 분노가 솟구친 나는 소리를 지르며 오빠와 육탄전을 벌이며 쫒고 쫓기고 뛰어다니며, 비로소 그 심각한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 그 또래의 아이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이후로 이런 생각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가끔 다소 '철학적'이라는 말을 듣고는 한다. 철학적인 것이 좋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솔직이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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